2010 목포마당페스티벌/2009 목포마당페스티벌 NEWS

특별전시행사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수묵 展

극단 갯돌 2009. 7. 13. 13:43

전국우수마당극제전 특별전시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수묵화 전시회

오는 23-26일, 목포유달산 모심문화예술센터
유작 50여점과 만인계 서남권준비모임 등 다채


길을 가다 만나는 사람들, 길가의 좌판 장수, 식당주인, 농부들, 만나는 사람 한 사람 한사람과 나누는 얘기, 아이들 소식에 농사 얘기, 살림살이며 시절 얘기를 나누는데 보통 두 시간 이상일 만큼 사람과 세상, 뭇 생명들에게 극진했던 사람, 장일순.
그가 남긴 삶이 가르침과 정신이 되고 문화가 되어, 세인의 마른 가슴에 어우러짐의 꽃으로 피고 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생명평화운동의 씨앗을 틔웠으며 난초그림과 글씨로도 유명한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이 전국우수마당극제전을 맞아 오는 23일부터 26일까지 본향인 강원도 원주 무위당기념관을 떠나 목포유달산 유달예술촌 모심문화예술센터에서 전국우수마당극제전(위원장 배종범)과 극단갯돌(대표 이방수)의 주관으로 선보인다.


이번 행사에는 전국우수마당극제전 9년을 맞아, 고인의 뜻을 기리고 살리기 위한 유작‘심중무물’등 파격과 예법을 아우른 글씨들과 담백하고 청아한 난초 문인화 등 50여점의 작품들이 항구도시 목포를 찾는다.

이번 무위당 목포특별전시회 행사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년이면 10주년이 되는 전국우수마당극제전은 지난 2001년부터 현재까지 9년 동안 생명과 평화, 상생의 근원이 되는 공연예술축제를 펼쳐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해왔다. 이번 무위당 전시회는 일생을 낮은 자세로 생명과 평화실천에 헌신하셨던 무위당 선생을 통해 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고자 마련했다.

전국우수마당극제전은 오는 23일 축제의 첫 시작을 무위당 특별전시 개관식으로부터 펼쳐질 예정이다. 개관식은 갯돌의 열림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축하공연과 함께 진행된다. 특히 개관식에서는 무위당의 본향인 원주의 후학들이 목포를 방문하여 목포특별전시 소회를 밝힌다. 무위당의 후학들은 현재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인‘무위당 좁쌀 만인계(상임대표 김영주(전 신협중앙회 연수원 원장))’를 출범하여 선생의 뜻과 실천을 오늘에 잇고 있다.

아울러 개관식에서는 무위당의 생전모습을 담은 영상과 함께 전시 관람을 한 후 목포, 광주를 비롯한 인근 서남권 지역의 만인계 한마당을 황도근 상지대 교수의 좌장으로 진행 할 예정이어서 생명과 평화, 농민운동 등 대안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

무위당 장일순의“후일 내 이름으로 하는 어떤 행사도 하지 말라”한 생전 당부로 그간 무위당 행사는 오랫동안 원주 근교 그의 묘소 참배만 이루어져 왔다. 최근 들어 무위당선생의 유지를 거스르면서 무위당 행사가 열리는 것은 그만큼 무위당의 삶과 사상이 시대정신으로 요구되고 있기 때문.

이번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전국우수마당극제전 배종범 추진위원장은“반독재 민주화운동가이자 생명평화사상가인 장일순 선생의 정신과 철학, 삶을 통해 어려운 시대적 위기를 진단하고 생명평화운동의 일상화를 모색하기 위해 이 행사를 마련했다”며“앞으로 이 행사를 통해 전국우수마당극제전의 향후 방향성을 찾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밝혔다.




2009전국우수마당극제전 특별전시회 구성안

1. 행사개요
○ 일시 : 7월 23(목) ~ 26(일) / 4일간
○ 장소 : 모심문화예술센터(목포유달예술촌 內)
○ 내용 : 개관식,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수묵전
○ 행사주관 : 전국우수마당극제전추진위원회.모심문화예술센터.극단갯돌. 무위당 만인계

2. 행사계획
○ 개관식
▸일시: 7. 23(목) 18:00 ~ 19:00
▸장소: 모심문화예술센터
▸프로그램
- 열림굿, 무위당 만인계 나들이 소회,
테마영상 ‘무위당 장일순’, 축하공연, 전시관람

○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수묵展
▸일시 : 7. 23(목) ~ 26(일) 10:00~20:00 / 4일간
▸장소 : 모심문화예술센터 전시관
▸콘텐츠
- 전시1 - 무위당의 생애
- 전시2 - 무위당 수묵화 전시 (50여점)
- 전시3 - 무위당 좁쌀 만인계
- 전시4 - 무위당 영상소개

○ 무위당 만인계 서남권 마당


무위당 장일순은 누구인가
장일순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좌표
한살림 등 대안운동 통해 농업과 생명평화운동의 길 연뒤 67세로 영면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원 월드 운동'에 참여했다. 20대 중반에는 김재옥, 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영희 등과 함께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웠다.

30대 초반에는 '참여해서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생각 아래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특히 삼십 대 중반, 미국이나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정치범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3년간의 옥살이는 장일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감옥은 장일순에게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가르침에 따라 장일순은 그 뒤로 파워 게임과 야합이 판을 치는 정치판보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아래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숨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출옥한 뒤로도 장일순은 오랫동안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에 묶여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활동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 때 장일순은 서울로 유학을 가며 그만 둔 붓글씨를 다시 시작했다. 장일순에게 붓글씨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한 방편이자 마음을 닦는 묵선墨禪이었다.

그처럼 운신이 편치 않은 속에서도 장일순은 19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립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인 신용협동조합의 설립과 정착을 도왔다.

1970년대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였던 지학순과 손을 잡고 원주가 앞장서서 비판정신을 갖고 부패한 정치권을 일깨우거나 때로는 저항하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그 주춧돌 구실을 했다.

80년대에는 정치 투쟁이 아닌 생활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서는 천지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한살림의 세계관인 생명평화사상을 이 땅에 태동시켰다. 또한 해월 최시형을 세계적인 사상가로 발굴해 소개한 것도 장일순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장일순은 이런 일을 아무런 직함도 갖지 않은 채 이루어냈고 또한 평생 돈벌이를 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부부간이나 가족간 대단히 화목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장일순을 두고 세상은 제가와 평천하를 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게 힘든 사람이 없도록 두루 잘 아우른 사람이라 말했다.

무위당의 면모는 성장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도 반드시 두 손으로 드리도록 엄하게 가르친 일이라거나 먼저 죽은 손자의 상여를 향해 절을 했던 조부의 모습은 어린 장일순에게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주었다.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 부지는 부유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희사했는데 이러한 일들에 대해 사람들은 장일순과 그의 조부를 '낙타를 타고 바늘구멍을 빠져나간 사람'이라고 칭했다.

말년의 장일순은 자신의 여성성을 활짝 꽃피운,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부드럽되 언행은 만인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늘 바로 보았고 또한 앞서서 보았다. 그런 장일순을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그의 집은 년 중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위당 장일순에 대해 세상은 부모 없는 이들의 맏형으로 아버지로 모시는 등 세상의 애정은 각별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 한눈에 반했다 했고 목사 이현주는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다.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라 했고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 이슬'의 김민기는 그를 아버지로 섬기고 살았다. 판화가 이철수는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았고 일본의 사회평론가 쓰무라 다카시는 마치 '걷는 동학' 같은 인물이라 평했다.



■무위당 장일순 약사

20세기 경쟁과 투쟁의 논리, 인간의 오만과 횡포를 넘어 이 땅에 농업과 생명평화운동의 큰 길을 연, 우리 시대 마지막 '도덕 정치가','초야서가草野書家'의 문인화가

우리 시대의 마지막 '도덕 정치가'이자 마지막 '초야서가(草野書家)'의 문인 화가였던 무위당 장일순은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다니던 한 시절을 빼고는 줄곧 원주에서 살았다.

무위당은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해방구였던 원주 캠프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50년대엔 원주 대성학원을 세운 교육자이기도 했다.

1960년 4.19 직후 혁신 정당이던 사회대중당 후보로 민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으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중립화 평화 통일론을 주장하던 그를 감옥에 가뒀다.

이후 장일순은 정치 정화법과 사회 안전법에 묶여 철저한 감시를 받는다. 그런 와중에도 지학순 주교, 시인 김지하, 박재일 등과 함께 강원도 일대의 농촌과 광산 지역의 농민,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 운동을 지도하면서 원주 해방구를 일궈냈다.

이후 무위당은 1972년 이후부터 1979년 유신정권의 붕괴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동, 농민운동 등 제반에 걸쳐 반유신 저항 운동의 정신적 표상으로 막후 지도를 해왔다.

걷는 동학이라 불리던 장일순은 밥이 곧 하늘이고 모든 생명은 하나임을 일깨우며 80년대엔 한살림운동을 이끌어냈다. 원주 봉산동의 그의 집은 수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피난처이자 오아시스였고 장일순은 그들의 사상적 버팀목이 되었다.

말년의 아호를 한 알의 작은 좁쌀이란 의미의 일속자一粟子로 스스로를 낮춘 무위당은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이라 주창하며 20세기 경쟁과 투쟁의 논리, 인간의 오만과 횡포를 뛰어넘는 농업과 생명평화운동의 큰 길을 열어놓고 1994년 5월 향년 67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무위당 장일순 연보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부친 장복흥과 모친 김복희 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호는 호암湖岩이었으나, 60년대 청강靑江, 70년대 무위당无爲堂, 80년대 일속자一粟子로 바꾸어 씀. 유년시절부터 할아버지 여운 장경호 밑에서 한학을 익히는 한편 생명공경의 자세를 배움. 묵객으로 할아버지와 절친하던 우국지사 차강 박기정 에게 서화를 익힘.

1940년 원주초등학교 졸업.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음. 서울로 유학.

1944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

1945년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

1950년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옴. 이후부터 줄곧 원주에서 생활.

195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대성학원을 설립. 이후 5년간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봉직.

1955년 봉산동에 손수 토담집을 지어 생활함.
1956년 무소속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

1957년 이인숙과 결혼. 슬하에 3남을 둠.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낙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름.

1963년 출소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이사장직을 박탈당함.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기 시작함.

1964년 이 해부터 몇 해 동안 포도농사에 전념.

1968년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 운동 전개.

1971년 10월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 시위를 주도. 이 시위는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촉발하는데 큰 역할을 함. 이후부터는 민주화 운동을 막후에서 전개.

1973년 전 해 여름에 닥친 큰 홍수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마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을 준비하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의 관심과 연대 호소.

1977년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되겠다고 깨닫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

1983년 민주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주통일 국민연합을 발족하는데 일조함. 10월 29일 도농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전개.

1988년 한살림 운동의 기금조성을 위해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 개최. 다섯 번에 걸쳐 전시회를 가짐.

1989년 해월 최시형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원주시 호저면 송곡에 비문을 쓰고 기념비를 세움.

1991년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를 발족하는데 고문으로 참여. 6월 14일 위암으로 원주기독병원에서 수술.

1992년 생명사상을 주제로 한 강연 다수.

1993년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펴냄. 9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 11월 13일 민청학련 운동승계 사업회로부터 투옥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음. 평생의 동지였던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기 위해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의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

1994년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