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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근대역사여행 행복한 가을여행~

극단 갯돌 2017. 10. 19. 11:50


갯돌만이 해낼 수 있는 국립문화재청이 주관하는 생생문화재 <목포근대역사여행>이

10월 4일 토요일 4시부터 목포양동, 북교동 일대에서 펼쳐졌습니다.
100년이 넘는 근대역사를 자랑하는 근대도시, 항구도시 목포에서 멋진 가을날 오후 아주 특별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20여명의 여행자들과 함께 
목포근대 삶이 고스란히 놓여있는 
양동, 북교동의 골목길을 거닐었습니다.

애틋하고 정겹고 
오붓한 낭만이 가득한 여행이었습니다.


날씨도 좋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역사유적공간에 맞게 설계되어 힐링을 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혀 왔습니다.

목포근대역사여행은 역사공간을 통해 예술적 상상력으로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갯돌의 여행프로그램 형식은 2004년부터 시작해 10년을 훌쩍 넘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동안 목포의 많은 공간과 역사를 소재로 해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거쳤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오늘의 성공을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여행코스:
이난영 생가터(집결)→양동육거리→양동골목길→박승희열사 추모비→양동교회→ 북교초등학교(역사관, 느티나무)→김우진 생가터(북교동성당)


게스트로 참여해주신 
고윤혁(박승희 열사 고교 은사님), 노정희(북교초교 교감), 정옥례(통기타가수), 정별님(소프라노), 최희자(문화해설사) 등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행자들은 이난영 생가터에 집결했습니다.

갯돌 하진솔 단원이 이난영 특유의 비음과 맑은 청으로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노래를 열창했습니다.

양동의 어르신들도 신기해서 대문을 열고 나와서 구경하십니다. 간드러진 이난영의 목소리가 동네를 울립니다.

이난영의 가난했던 유년기 시절을 상상해냅니다.

이난영은 1916년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어렸을때 막간가수 생활로 떠돌다가 1935년 '목포의 눈물'로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그녀가 노래를 잘 부른 이유가 양동의 문화권 영향이라고 합니다. 양동은 서양인 선교사가 들어왔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아마도 이난영은 어렸을 때 교회를 오가며 찬송가를 부르고 건너편 죽교동 권번가에서 악가무를 체험했을 듯 합니다.

이러한 양동문화권의 정서가 그녀를 예술가로 키운 것이라 추정됩니다. 



극단갯돌이 시간여행을 알리는 동상퍼포먼스로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갯돌 문관수 대표님도 출연합니다. 문대표님도 이곳에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80년대 갯돌단원들은 거의가 이곳에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애정의 정도가 깊어질수밖에요.



양동육거리에서 깜짝 뮤지컬이 재현됩니다.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가 흘러나오고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박물장수, 옥단이 물지게꾼, 땜장수, 옹기장수 등이 출연합니다.

100여년전 목포의 양동에는 도시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여행자들이 옥단이 물지게를 체험하기 위해 한컷~

예로부터 목포는 개펄을 매립했기 때문에 물이 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지게꾼 옥단이의 레전드가 내려오고 있지요. 차범석 선생의 희곡'옥단어'에도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갯돌의 목포근대 작품에는 옥단이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합니다.

옥단이는 100여년 전 인물로 바보스럽고 순진해 동네의 아이콘이 될만큼~~

부지런하고 남의 집 허드렛일 등으로 이웃을 돕고 살았다고 합니다. 춤과 노래를 잘 추고 긍정적인 사고와 밝은 웃음으로 동네사람들을 대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옥단이는 목포의 민초를 대변합니다.



문관수 대표님께서 동네사람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저 기억하시제라우~ 요 밑에 집 관수여라우"

"오메 맞네 기억나네~ 많이 커부렀네잉~"

어르신들께서 즉시 알아본것을 보면 문대표님에 대한 정겨운 기억을 갖고 있나 봅니다.


물지게를 지고 양동의 좁은 골목을 나섭니다.

오늘의 목포를 있게 한 도시 노동자들의 고달프고 궁핍한 삶이 그대로 전해옵니다.

근대문학의 선구자 김우진 또한 자신의 작품 '이영녀'에서 목포건설의 주역이 도시노동자였음을 고백하고

이들의 영광 뒤로 얻은 것은 돈이 아니라 낮은 임금으로 피폐한 가난뿐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배부르고 등따순 삶을 위해 노력했지만 무산자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지독한 가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골목에서는 늘 고단한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놀이감을 찾아 떠들썩하게 놀기도 합니다.

어른들도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모여 앉아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면서 얼싸덩싸 보리떼춤을 추고 놀기도하는 곳입니다.

골목은 웃음과 울음이 묻어나 있습니다.  

 

갯돌단원들이 지난 80년대 판소리를 배웠던 곳이라고 합니다.

돌아가신 소리꾼 김창남 선생님의 댁입니다. 목포국악예술원~!

국립국악원 이영태, 김나영, 이승민 등 수많은 소리인재들이 스승인 김창남 선생님의 기억을 갖고 계신다고 합니다.

김창남 선생님은 몸이 다소 불편하셨지만 항상 유머가 넘치셨고 정이 깊으셨다고 합니다.

갯돌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셨고 행사가 있을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공연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이곳은 북교동, 양동 사람들의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소리에 관심있는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드나들면서 선생님께 소리를 배우고 서로 안부를 묻고 웃고 즐기는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화기애애한 사랑방이 된셈이죠.

사모님께서는 옛정을 잊지 못하시고 아직도 간판을 내리지 않고 동네분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겨레의 딸 박승희 열사 추모비입니다. 양동육거리에서 정명여고 뒷담쪽에 위치해있습니다. 흉상이 소담합니다.

박승희 열사는 정명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합니다.

열사는 대학때 전남대 교지 편집위에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정명여고 시절부터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 투쟁과 학원자율화 투쟁 등 사회운동에 눈을 떠 올바른 세상을 고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1991년 전남대 시절 그녀는 폭력정권퇴진, 미국반대, 조국의 자주화를 위해 저항하다 분신하십니다.       



정명여고 시절부터 박승희 열사가 존경했던 고윤혁 은사님께서 특별히 와주셔서 지난 날을 회고했습니다.

고윤혁 선생님은 현재 목포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갯돌에서 활동을 하셨고 현재는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조용하신 성격에 늘 후배들을 위해 걱정해주시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분입니다.  

고윤혁 선생님께서는 몇년 전 갯돌에 박승희 열사 뮤지컬 제작을 제안하셨는데 우리는 아직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필코 박승희 열사의 작품을 제작할 것입니다.  

 

박승희 열사는 유난히 정의롭고 착한 학생으로 기억되었고 고교시절부터 열정적인 활동을 해왔다고 합니다.

동년배 여행자들 중에 한분이 눈물을 흘려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유서를 낭독하고 젊고 꽃다운 나이에 조국사랑에 대한 애끓는 마음으로 불꽃이 되신 박승희 열사의 넋을 기렸습니다.


 










목포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양동교회에 들러 당시 선언문 낭독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태극춤으로 독립의지를 재현합니다.

양동교회는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이 1897년에 설립합니다.

목포에는 1919년 일어났던 '4.8독립만세운동'이 유명합니다.

4.8 독립운동은 양동교회가 주축이 되어 감행합니다.

양동교회를 축으로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목포상업학교, 목포고등보통학교 등이 앞장서 운동을 일으킵니다.

양동교회에서는 선언문을 인쇄하고 운동을 모의하는 등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4월 8일 목포시민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만세를 목놓아 불렀다고 합니다.

그일이 있은 뒤로는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많은 시민들이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양동교회 마당에 모였습니다. 병풍같은 유달산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아마도 양동교회에 있는 돌벽들도 유달산의 바윗돌을 캐와서 건물을 지은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돌벽들은 목포청년회관, 정명여학교, 광생의원, 북교동교회 등 원도심 도처에 문화재급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달산에서 캐온 돌이 시민의 보금자리에 쓰여졌으니 지역의 자연환경을 이보다 더한 천연자연건축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포의 역사가 한곳에 쏠린 그 유명한 북교초등학교 역사관에 들렀습니다. 노정희 교감선생님께서 직접 여행단을 맞이하셨습니다.

학교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신 선생님이십니다. 주말임에도 시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교감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역사관을 방문해 북교초교의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김우진(근대문학인), 이난영(가수), 박화성(소설가), 차범석(희곡작가), 차남수(의사), 김 현(문학평론가), 이매방(무용가), 김대중(대통령), 남농허건(동양화가) 등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모두 북교출신입니다. 명문임에 틀림없습니다. 목포의 역사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북교초교 5층석탑입니다. 1897년 개교한 북교초교가 1901년 이곳으로 이전했는데, 그 이전부터 석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래의 석등또한 같은 시대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의 깊은 역사를 짐작하게 합니다.

 






여행자들은 북교초교 느티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가을을 즐깁니다.

통기타 가수 정옥례님을 초대해 오붓하고 한적한 가을 낭만을 노래로 만끽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목포역사에 대한 퀴즈놀이를 펼쳐 푸짐한 상품을 줍니다.

아름다운 느티나무 아래에서 달콤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북교초교 느티나무는 석탑과 같이 1897년이전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느티나무의 수명은 은행나무와 함께 천년을 넘긴다고 합니다.

느티나무는 자식을 많이 거느린 부모 혹은 많은 학동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 같다 해서 훈장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당마당, 입구, 고개마루 등에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북교초교 느티나무 전설이 있는데 옛날 인근에 사는 가난한 선비가

이 나무 아래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글공부를 하는데

나무가 이 선비를 보호해서 겨울엔 눈바람을, 여름엔 장마비를 막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방의 유지들이 바로 이곳이 명당이라 해서 

목포최초의 학교를 바로 나무 옆에 세웠다는 얘기입니다.    



여행자들이 김우진 거리에 멈춰서 그의 생애를 담은 벽화를 보면서 해설을 듣습니다.

그는 목포북교 출신으로 근대예술의 선구자입니다.

전통극과 신파극 중심의 한국근대시기에서 신극운동을 일으켰고 근대화 속에서 새로운 예술을 도입하고 문학을 개척한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일본 유학 중에 극예술협회, 동우회순회연극단 활동을 했고 짧은 생애동안 총 다섯편의 희곡을 남겨 한국연극사를 새롭게 쓴 인물이었습니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의식으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왔던 인물입니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짦은 생을 안타깝게 마감했지만 살아 생전 그의 예술론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소프라노 정별님께서 김우진 생가터가 있는 북교동 성당 앞에서

김우진이 사랑했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 노래를 시작으로 

목포의 눈물, 10월의 어느 멋진날을 곱게 뽑습니다.

단아한 북교동 성당이 클라식 무대와 어우러져 낭만적인 가을밤 무대를 갖습니다.

여행자들이 고운노래에 취합니다.  


아쉬운 시간을 뒤로하고 여행자 모두 목포근대역사여행을 기념합니다.

목포근대역사여행은 단순히 유적관람에 머물지 않고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확장한 예술공연을 가미해 여행자들의 상상을 돕는 프로그램입니다.

또한 여행자들에게체험과 놀이를 곁들여 유쾌한 여행이 되고자 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색다른 이색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