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에 실린 글입니다. 이윤선 교수님은 이번 문순득 프로젝트 오키나와(2017. 12. 15~20)에 동행했습니다. 12월 18일 사키마 미술관에서 갯돌과 서승아 선생님의 퍼포먼스를 관람, 느낀 소회를 인문학 관점에서 다뤄주셨습니다. 26만 6905개 돌무더기의 의미 |
오키나와 전쟁과 사키마 미술관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입력시간 : 2017. 12.22.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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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이 주는 영감이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놀빛이 아름답다고 차마 말하지못할 경우를 맞는 당황함이라니. 사키마(佐喜間) 미술관 623 계단의 끝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그렇다. 아래 계단이 여섯 개요 윗계단이 23개다. 6월 23일 오키나와전쟁이 끝난 날을 상징하는 설계다. 실제 6월 23일 오후 일곱 시에 동쪽 창문과서쪽창문에 태양이 일직선상에 걸치도록 고안한 작품이다. 계단 끝에서 멀리 해안을 바라본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이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다. 붉은해를 적시는 오키나와 중부 기노완시의 해안을 몽땅 미군이 점유하고 있다. 발아래 오키나와식 전통 묘지 가메코바카(龜甲墓)들이 보인다. 묘지 안에 들어간 주검들은 그래도 낫다. 차마 무덤에 들지 못한 혼령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설픈 감상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무언의 외침일까. 사키마 미술관에서 바라보는일몰은 단순한 놀빛이 아니라 차라리 위령의 빛이다. 비운에 죽어간 혼령들을 보듬고 날마다 안식으로 이끄는 태양의 죽음이지 않는가.
이십육만육천구백오개의 돌무더기가 말하는 소리
땅거미 내리는 마당으로 나온다. 부토춤의 명인 서승아씨와 극단 갯돌 단원들이 질베를 펼쳐 혼령들을 불러낸다. 모두 26만6905명이다. 배우들에게 빙의된 영혼들은 처절하게 몸을 비틀며 무언의 통곡들을 쏟아낸다. 정중동의 움직임들, 멈춰서 있는 듯 보이지만 무언가 뜨겁게 움직이는 것들이 있음을 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나누는 눈빛들의 대화다. 배우들의 몸짓이 처절하게 짓이겨질수록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인다. 그들의 부모와 형제들이 죽어갔던 동굴과 들판과 산 그리고 바다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곳 마당에는 실제 '돌의 소리'라는 돌무더기가 있다. 1996년 6월 23일 오키나와 고등학생들이 전몰 희생자를 상징하는 26만6905개의 돌에 각각 번호를 써서 쌓아 만든 일종의 돌무덤이다. 지금은 글씨도 마모되고 무더기도 낮아져서 평평한 수준이 되었다. 갯돌의 손재오 감독이 우금치와 제주에서 돌 한 개씩을 가지고 와 합석(合石)을했다. 왜 우금치의 돌이고 제주도의 돌일까? 삼척동자도 안다. 동학과 제주 4.3이오키나와의 비극에 직간접적으로 걸쳐 있음을. 이것은 다시 광주 5.18로 연결된다. 부마항쟁으로 이어지고 6.25 민족상잔으로 연계된다. 2005년에 이곳에 특별전을 열었던 홍성담의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왜 한국인들이 평화의 소망을들고 이곳에 와서 묵상하고 가는지. 이제 한반도의 돌을 섞었으니 이 몸짓들의연대가 가져올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남북통일의 소망까지를 담은 그 이름을 한마디로 말하면 평화다.
삶과 죽음, 고뇌와 구제, 인간과 전쟁에 대한 콜렉션
사키마 미술관의 콜렉션을 관통하는 테마들이 있다. 삶과 죽음, 고뇌와 구제, 인간과 전쟁이 그것이다. 미군기지에 포함된 조상의 땅을 반환받은 사키마 미치오관장이 이곳에 미술관을 짓게 된 동기가 여기 있다. 오키나와 전쟁에 대한 환기를 넘어서는 기획들이다. 실제 미술관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은 미군점유지다. 예컨대 성묘를 가기 위해서는 미군기지로 들어가야만 한다. 어찌 보면 미군이 점유한 오키나와를 설명하는 가장 상징적인 공간일 수도 있다. 기억을 위해 고안된 계단에 오르면 온통 후텐마 미군기지를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사키마 관장은 이곳이 사유하는 공간이길 바란다고 말한다. 오키나와 전쟁을 단순히 기억하는것이 아니라 성찰과 사유가 동반되어함을 강조하는 얘기다. 전시되는 작품들을 보면 이 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원폭과 반전을 그린 판화가 우에노 마코토, 케테 콜비츠, 조르주 루오 등 무수한 작품들 말이다. 상설 전시되는 마루키 이리와 마루키 도시의 '오키나와 전쟁도(戰爭圖)'는 한 세기만에 인류가 경험한 가장 끔찍한 역사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1994년 11월 23일 이 미술관이 개관된 것은 오키나와뿐만이 아니라 평화 연대를 구상하는 인류에게 축복 같은 것이다. 여기서 이룬 평화의 메시지가 매우 강렬한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자주 찾는 곳이 되었다.
오키나와 전도(戰圖)를 통해 말하려는 것들
그림은 물감이 번진 듯 모호하다. 선과 면들이 중첩되고 푸른색과 붉은색이 흩뿌려져 대비를 이룬다. 나무의 강한 뿌리처럼 혹은 암벽을 타고 오르는 가지들처럼 엉켜있다. 자세히 보면 흩어진 주검들이 보인다. 눈이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제야 알겠다. 이것이야말로 충격적인 메시지임을. 매우 강렬하다 못해 처절함을. 오키나와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강제적 집단자결이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점에서 '강제적'이라는 수식을 붙인다. 동굴 속에서 아버지가 아들 딸을, 지도자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또 스스로 죽어갔다. 그 주검들이 널브러져있다. 아래편엔 미군의 군함들이 줄을 이어 서 있다. 바다는 이내 피로 물들었다. 파란색의 바다를 물들이는 붉은색의 핏빛이 보인다. 물속에서 잠자는 사람들 사이로 진실을 응시하는 소년이 보인다. 오키나와 자연동굴은 한마디로 거대한 무덤이었다. 오키나와 본토인을 내쫓고 동굴 안에서 목숨을 건진 비겁한 일본인들도 보인다. 전장을 헤매는 여성, 어린이, 노인 등이 보인다. 스파이 용의로 처형된 구중회씨 등 실명도 보인다. 바람개비가 돈다. 무엇보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점은 여기 그려지지 않은 여백들에 대한 이야기다. 다 하지 못한 이야기, 차마 드러내지 못한 이야기들 말이다. 오키나와 인구의 1/3이 죽어갔던 이야기를 어찌 한장의 그림에 담아내겠는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를 또 어찌 다그려낼 수 있겠는가. 하단 오른편에 이 그림을 그린 마루키 토시와 마루키 이리가 검은색의 낙관처럼 박혀있다.
날마다 일요일이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소설 '태양의 아이(太陽の子)'에서 초등학교 6학년 '후짱(ふうちゃん)'이 한 말이다. 하이타니 겐지로(1934~2006)는 이 소설을 통해 류큐의 비극을 소박하지만 강하게 그려냈다. 류큐(琉球)의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투사해온아버지를 담담하게 그려낸 역작이다. 한 팔 없는 로쿠 아저씨의 절규는 오키나와의 비극을 한 마디로 압축해 보여준다. "오키나와 군대가 우리들에게 죽으라고 했다. 명예롭게 죽으라고 수류탄을 주었다. 나라를 위해, 천황폐하를 위해 죽으라고 했다. 우리들은 한데 모였다. 한복판에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오키나와의 수많은 자연동굴 속에서 행해졌던 비극들이다.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는 그 중 대표적인 곳이다. 오키나와전도를 그린 마루키토시는 말한다. "수치를 당하기 전에 죽어라. 수류탄을 주시오. 낫으로 괭이로 면도날로 해치워라. 부모는 자식을, 남편은 아내를, 젊은이는 늙은이를, 에메랄드빛 바다는 붉은 빛으로."
그래서 집단 자결이란 손을 빌리지 않은 학살이라고 말한다. 전후에는 오키나와의 비극에 대해 현지인들도 말을 아꼈다. 피해와 가해가 중첩되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하나 둘 말을 시작했다. 증언들이 이어졌다. 화가는 그림으로, 문학가는 시와 소설로, 역사가는 서술로, 민속학자와 예술가들은 구술담과 예술행위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키나와에서 부치는 편지
오랜만에 편지를 쓴다. 류큐 사람들의 원성을 담아 닮은꼴 내 고향 남도사람들에게.
'갯돌'이 사키마 미술관에 헌사한 우금치의 돌과 제주도의 돌은 황톳길 선연한 우리의 핏자국을 닮았다. 지금은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어도 내가 김지하의 황톳길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메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오키나와 사람들 중에 이제는 류큐 사람이라 불러달라는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 스스로의 정체에 대한 자각일지도 모른다. 남의 나라 일이니 크게 관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만큼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남도(南島) 혹은 남도(南道)의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오키나와에는 전통 묘지 가메코바카(龜甲墓)가 있다. 나는 이를 어머니의 자궁으로 해석한다.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이중장제의 하나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분과 오쟁이쌈 등 지난 칼럼에서 내가 다루었던내용들이다. 고통 받고 죽어간 오키나와와 한반도의 영혼들이 더 좋은 어떤 곳에서 재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이 편지를 받는 내 고향의 누군가가 보내올 답장을 기다린다. 회신이 오는 날 남도 어느 자락에서 만나 류큐산 아오모리와 막걸리 한잔으로 소회를 풀어볼까.
남도인문학 TIP 아트로 평화 만드는 사키마 미술관
사키마 미술관 행보를 인용하여 답사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아트로 평화를 만든다는 슬로건을 걸고 있다.
요즘 들어 한국의 평화 관련 답사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1975년에 사키마 미치오 '그림 콜렉션'을 시작했다. 우에노마코토, 케테 콜비츠, 조르주 루오, 도네야마 고우진 등 명성이 높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1983년 마루키 이리와 마루키 토시가 '오키나와전도' 작업에 착수하고 이곳 미술관에 전시하기를 희망하였다.
1984년에 마루키이리와 마루키토시와 만나 '오키나와전도'를 상설전시하기로 합의했다. 1992년 미술관 건립을 위해 토지반환운동을 시작했다. 미군 후텐마 기지 안에 있던 사키마씨 조상의토지 1801㎡를 반환받게 되었다. 1994년 11월 23일 마키시 요시카즈가 설계한사키마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1995년 사키마 미술관이 유엔에서 출판한 '세계의 평화박물관'에 수록되었다. 1996년 오키나와 고등학생들이 오키나와전 희생자숫자대로 26만6905개의 돌에 번호를 써서 돌탑을 쌓아올렸다.
2005년에 한국의홍성담 특별전을 개최했다. 2010년 중국 저장성 미술관과 북경 루신 박물관에서케테 콜비츠전을 개초했다. 2011년 제33회 류큐신보 활동상을 수상했다. 2014년 이와나미 북클렛 '아트로 평화를 만든다.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의 괘적'을 출판했다. 2015년 한국 북서울미술관에서 케테 콜비츠전을 개최했다.
마루키이리(1901~1995)와 마루키 토시(1912~2000)는 히로시마의 '원폭그림' 15부를 그린 화가다. 오키나와 현장에서 체험자의 증언을 직접 듣고 그들을 실제 모델로해서 '오키나와전도'를 14부 연작으로 그렸다.
마루키 이리는 장대한 수묵화를그린 화가로, 마루키 토시는 130권의 그림책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2017년12월 극단 갯돌이 우금치와 제주도의 돌을 가져다 사키마 미술관 돌탑에 합석하였다.
남도민속학회장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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